L.BEAN대한민국 최초의 로스팅어 박원준 선생님이 떠오르는

박원준 선생님과 앨빈의 커피이야기

하나, 박원준 선생님과의 예사롭지 않은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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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엘빈 창시

박원준 선생님과 엘빈의 만남은 예사로운 일은 아니었다. 인연이 예사롭지 않은 만큼 박원준 선생님은 철저히 핸드드립커피, 더치커피, 사이폰 등 다양한 드립으로 철저히 교육을 시켜 일본의 커피장인이신 친구분들을 초청하셔서 엘빈 커피숍을 오픈하셨다. 선생님께서는 엘빈을 통해 당신의 커피를 선보이시기를 원하셨다(1994년 극동빌딩 뒤 엘빈) 그 당시 엘빈의 더치커피의 우수함을 일본 가라사와 소장께서 일본신문의 일면에 실었다. 선생님은 항상 자신에게 철저 하셨으며, 모든 일에 냉철함이 지나쳐 까다롭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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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신문 일면에 엘빈커피의 우수함

다도원 박원준 선생님의 커피 철학은 한마디로 커피사랑이었다. 그 어떤 것과도 바꾸지 않는 것은 커피였다. 함부로 커피를 만져서도, 버려서도, 마셔서도 안되는 것이다. 커피를 대하는 자세가 항상 정도를 가지셨다.

둘, 로스팅의 아찔한 기억

사당역에 엘빈 2호가 오픈한지 10년이 지났을 때 나는 로스팅 기계(후지로얄1Kg)를 샀다.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학습용 로스팅 기계라는 명목으로 샀다. 우리집 거실에 주방 씽크대 위 환풍기와 로스팅 기계 환풍기와 십자형으로 묶어 밖으로 연기가 나가도록 설치했다. 어느 날은 어떤 남자가 우리 현관문을 급하게 큰소리로 두드렸다. 문 열어요, 문 열어요 하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 일인데요 나는 아무렇지 않게 문을 열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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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옥 사장이 처음 커피 볶던 집

우리집이 2층이었는데 올라오는 계단에서 소방대원들이 계단계단 줄을 서서 손에 길쭉한 것을 들고 등에는 LPG가스통 같은 것을 메고 머리에는 소방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썼다.나는 너무 놀라서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불이났다고 신고가 들어왔다며 집으로 막 뛰어 들었다. 나는 아니예요, 아니예요라며 불안났어요 라고 막았다. 소방관 어저씨는 우리집에서 창틈사이로 연기가 나서 신고가 들어 왔데요. 그제서야 집안을 보니 온통 연기가 자욱했다. 커피를 태운 탓이다. 소방아저씨들은 안심하고 되돌아 가시는데 밖에서는 사람들이 웅성웅성거리는 것 같아 너무 미안하고 죄송해서 죽은 듯이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그러자 소방아저씨 한 분이 뛰어 올라오면서 무엇이 탓느냐 해서 커피 태운 것을 보여주며 커피가 탔어요 라고 말하자 아 콩이 탓구나. 하면서 상부에 보고를 해야 되서요 하면서 돌아 가셨다. 커피가 탔다고 말을 하는데도 그 말이 무슨 말인가 하여 콩이라고 해석하신 것 같았다. 콩은 콩이니까 틀린 말은 아니였는데, 마음을 가라앉힌 후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옆집 할아버지가 창틈으로 연기가 계속나오자 놀래서 신고를 하셨단다. 소방차가 4대가 출동하고 소방대원이 줄을 섰단다. 나는 이튿날에 연통을 높이 옥상에 세웠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이 커피 볶는 집이라 써 붙이라고 했다.

셋, 박원준 선생님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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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가라사와 소장

그러기를 몇 년, 커피를 잘 볶는다는게 너무나 어렵다는걸 알게 되었다. 어느 날은 선생님께 상담 겸 제가 이 나이에 커피를 꼭 볶아야만 할까 고민스럽게 말씀드려 봤더니 냉정한 말투로 오늘 당장가서 기계를 치우는 것이 어떠냐고 하셨다. 아무 대답도 없는 저에게 조용한 말씀으로 약간은 위로하는 말씀으로 어느 항공사사장은 60세에 사업을 시작하여 대성하셨다며 그 나이에 무엇을 못하겠느냐 시며 용기를 주셨다. 그 이후로 나는 가끔 볶은 커피를 가지고 선생님을 찾아가서 테스트를 받았다.선생님께서는 초보자 냄새가 나는구나. 3초만 더 볶았으면, 3초만 덜 볶았으면, 좋았을걸, 늘 상 그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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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빈 커피 창시 문달용(1994년)

어떨땐 잘볶았다 하시면서 한번 더 내리셔서 맛을 보셨다. 그럴때는 묘한 느낌이였다. 그때는 정말 3초만 더 볶아야 한다, 덜 볶아야 한다는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로스팅에서 3초는 너무 긴 시간이다. 커피 로스팅은 그야말로 집중력과 오감으로 볶는다는 것을 말이 아닌 정신으로 한참 뒤에야 깨닫게 되었다. 이제야 깨우친 셈이다.

넷, 박원준 선생님의 작고와 엘빈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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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준 선생님과 문달용

박원준 선생님이 작고한 지금도 나는 커피를 볶기 시작할 때 선생님과 대화를 한다. 이미 돌아가신 분이지만 내 마음 속에 늘 자리하고 계신 것은 그분의 커피 사랑은 아무도 따라 갈수 없는 그야말로 커피에 대한 집념과 철저함, 최고가 아니면 만들지 않는 것이었다. 어떤 곳에 커피샵을 오픈하면 곧바로 방문하셨고 꼭 가보지 않아도 될 법한데도 배울 것이 없으면 버릴 것이라도 배워와야 한다며 찾아 다니셨다. 그분의 명언이 아닌가 싶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찔하다. 선생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엘빈은 많은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선생님 커피를 선보이던 장소로서 선생님의 커피가 없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난관이었다. 갑자기 당한 일이라 엘빈 식구는 우왕좌왕했다. 유명하다는 원두를 사다가 블렌딩도 해보고 여기저기 좋은 원두가 있나 찾아다녔다. 좋은 원두가 있다해도 스타일이 전혀달라 손님 입맛을 맞추는 것이 불가능했다.

다섯, 꿈에서 다시 만난 박원준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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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립하는 박원준

선생님께서 돌아가신지 14일 되는날 꿈에 선생님께서 멀리 외출을 하시고 돌아오신 분처럼 나타나셨다. 나는 너무 반가워서 어디가셨다 이제 오시느냐고 반가워하자 선생님꼐서는 눈을 크게 뜨시고는 단호한 말투로 "엘빈만 생각하면 답답하기가 말할 수 없다" 시며 크게 나무라셨다. 나는 너무 놀라 잠에서 깼다. 새벽 3시였다. 나는 그냥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몇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일어나 거실에 있는 로스팅 기계에 불을 켰다. 길은 하나뿐, 커피를 볶는 길 박엔 다른 길은 없었다. 나는 그때부터 미친사람처럼 커피를 볶기 시작했다.

여섯, 박원준 선생님의 의지 담아 만드는 최고의 커피, 엘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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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볶는 문명옥

4년이 되도록 커피를 볶았지만 내가 볶은 커피로 손님을 맞는 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는데,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보니 어쩔수 없이 선생님 커피 대신 내가 볶은 커피로 하루에 200명이 넘는 손님을 맞아 장사를 해야했다.(2008-2009) 여건이 많이 나아진 지금도 가끔 내가 태만하고 나태해질 때 선생님을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든다. 절대 게으름이나 대충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엘빈은 박원준 선생님의 의지를 이어가며 최고의 커피를 만들어 가고 있다.